- 좋아요. 그럼 길을 잃어봅시다.
이 여행에서 계획했다가 못 간 곳이 있는데 남프랑스의 생 레미 드 프로방스와 스페인의 콘수에그라이다. 교통이 좋지 않은 소도시라 준비를 잘했어야 했는데 조금 나른하게 지내다 두 곳 모두 놓쳐버렸고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이날도 콘수에그라와 세고비아 고민하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이기지 못해 콘수에그라를 포기하고 세고비아로 향했다. 콘수에그라는 오전 출발차가 매우 이른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배차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시간을 꼭 지켜야 했다. 라만차 지방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풍차 기념품도 꼭 사고 싶고.

백설공주의 성, 세고비아로.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 이동 방법은 10호선 프린시페 피오 Principe pio역의 Terminal Autobuses에서 세고비아 행 버스를 타면 된다.


세고비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거대한 로마 수도교를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기차 이동 중에 산맥 사이로 스치며 본 수도교의 거대함에 놀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교가 있다는 세고비아로 왔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접착제 없이 화강암 쌓기로만 제작된 다리라니 고도의 문명에 다시 놀랐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사진이 어두운 게 안타까웠다.

세고비아의 구시가지를 거쳐 알카사르로 향했다. 세고비아에는 성당과 궁전이 많아 볼거리가 많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알카사르가 너무 궁금해서 모두 스킵하고 직진 직진.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알카사르, 우아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디즈니 백설공주의 성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왕의 즉위식이나 결혼식이 올려진 왕실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물인 것 같다. 다른 스페인의 요새들과 같이 아랍의 요새가 있던 곳에 세워진 성이라서 그런지 산 위 고지대에 지어진 알람브라 궁전과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위키를 찾아보니 펠리페 2세가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결혼한 이후 중부 유럽의 궁전을 모방하여 슬레이트로 된 뾰족한 첨탑을 추가하고 중앙 정원을 완성했다고 한다. 아.. 퓨전, 융합ㅋ 마드리드로 궁전이 옮겨간 이후 2세기 동안 감옥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감옥으로 쓰는 아름다움 낭비라니. 성 앞에서 바라본 광활한 세고비아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저 길로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올 것 같지 않은가. 어느 때보다 동화적이다.


성 내부도 볼 수 있었는데 일단 이 성의 정면이 너무 궁금해서 일단 스킵, 스킵. 다시 올라와서 내부를 보기로 하고 성 밑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이 길이 이어져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져 내부는 결국 못 들어가 보았다. 세고비아 팁, 일단 성 밑으로 내려가면 버스터미널로 바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알카사르에 가기 전 시가지와 카테드랄, 성당을 둘러본 후 알카사르 내부를 본 후 성밑으로 내려가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성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매우 예쁘기 때문에 적극 추천한다.


알카사르의 모습. 아름답고, 우아하다. 귀부인 같다. 여행을 다니며 나는 많은 아름다움을 접했었구나. 행운이다. 결국 도시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버스터미널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Chocolatería San Ginés 산 히네스의 추러스. 항상 설탕 뿌려진 추러스만 먹다가 진하고 뜨거운 초콜라 떼와 함께 먹었던, 아 아직도 생각난다. 느끼하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난 다 먹음. 또 주면 또 다 먹을 수 있음. 핫초콜릿은 진리이니깐.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중. 마드리드에도 오랜 경기 침체와 복지 축소로 곳곳에서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위대 뒤로 경찰이 늘어져 있길래 저지선인가 싶어 충돌이 있을지도 모르니 피하기 위해 옆으로 붙었는데 끝에서 보니 뒤에서 시위대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따라가고 있던 중이었다. 이때가 한참 경찰차벽과 물대포 진압으로 강제연행이 생활화되어 있는 우리의 시위 문화에 젖어 있을 때라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Mercado de San Miguel, 산 미구엘 시장. 여기는 음식이 맛있기보다는 구경하는 재미인 것 같다. 유럽 마켓은 비닐이나 플라스틱 용기 포장이 적어서 그런지 디스플레이가 참 예쁘다. 한국에 돌아올 때 사 올 치즈나 과자는 이런 곳 말고 대형마트가 좋은 듯하다. 치즈값이 정말 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어 매일 들렀던 성당.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박한 작은 동네 성당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아니었다. 아마 스페인어에 ’소박한 ‘이란 단어는 없을 듯. 화려한 천장화, 벽화, 아름다운 성모상까지. 스페인의 마리아는 눈을 뗄 수 없도록 아름답다.



할러윈의 솔광장. 스페인은 이때까지도 할러윈 문화가 정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층을 위주로 퍼져가고 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온 교포분을 우연히 알게 되어 함께 펍에 갔는데 축제 분위기였다. 아가씨들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하고 웃고 떠들며 놀 수 있었던 내 성격에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클럽에 같이 가자는 아저씨도 있었는데 클럽은 안 갔다. 자야 되니깐.

왕궁과 대성당. 마드리드의 대부분 건축물들이 크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왕궁이 대표적.

스페인의 중심

나이트 투어. 마드리드의 주요 포인트를 저녁시간 동안 함께 걸어 다니는 일정이었는데 저렴하고, 코스도 좋았다. 특히 가이드가 스페인 유학생이었는데 스페인 역사와 문화에 해박해서 설명이 정말 재미있었다.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과 타파스를 먹으며 짧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혼자 여행온 직장인, 핀란드에서 스페인까지 이만 킬로 정도 달려왔다는 친구들과 자동차 여행 중인 대학생들, 그리고 퇴사 후 도망 나온 나, 유학 중인 가이드 선생님까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딱히 유난스러운 인간은 아닌 것 같다는 이상한 위안을 받은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 왜 얌전히 좀 참으면서 일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자책이 있었던 듯. 마요르 광장을 끝으로 투어도 끝이 나고 나의 여행도 끝이 나고 기나긴 퇴사 여행기도 드디어 끝이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내가 있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되지 않아 다시 오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뭐해 먹고살지? 귀찮다’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방바닥에 접착되어 뒹굴거리다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의 심정이 ‘오~ 귀찮았는데 오키‘ 이런 종류였어서.. 쩝.. 딱히 멋진 퇴사였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어떤 잡지에서 퇴직 후 이직에 실패하고 같은 자리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게 설마 내가 될지는 몰랐네. 그래도 스무살 이후로 한 번도 쉬지 못하고 계속 일해야 했던 나에게는 이때가 인생의 쉬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복직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운된 조건으로 중압감이 없이 일을 하게 되었고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심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정신건강을 지키고 있다. 일을 잘하는 건 좋지만 워커홀릭이 되지 말자는 나름의 지침도 함께 말이다. 이후에 다시 이직하고 육체적으로 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운 좋게도 척추 통증 관리는 매우 잘되고 있다. 아마 인간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서 디스크가 다 터졌었던 듯. 디스크 건강을 위해서는 좋은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
이 이후의 여행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는 않다. 언제나 일주일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문제들을 안고 정신없이 다녀오는 편이었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 내 앞에 쌓인 문제들도 모두 치워버리고 다시 여기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긴 여행을 가보고 싶다.
- 좋아요. 그럼 길을 잃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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