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퇴사여행, 서유럽

다시 스페인, 마드리드

야채타임스 2024. 3. 30. 21:15

- 프라도, 모래에 묻힌 개
 

마드리드는 깨끗하고 현대적이나 고풍스러움을 잃지 않은 유럽의 수도였다. 관광지가 17세기에 형성된 구시가지에 밀집되어 있다고 했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구시가나 신시가지나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란 비아 스페인 광장, 세르반테스 동상. 유럽 대문호의 동상이 있지만  저 깨발랄한 강아지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은 본능인 것이다.

 
프라도 근처에서 만난 예술가. 그라나다와는 또 다르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마드리드의 한적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프라도. Goya의 동상. 미술관에는 이제 흥미가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프라도 앞에 서보니 나 따위가 잃을 수 있는 종류의 흥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봐야 한다.

Angelico, Annunciazione

 
안젤리코 수태고지. 서경식 작가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보았던 간결하고 조촐한 아름다움의 피렌체 수도원의 수태고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수도사가 그린 같은 주제의 심지어는 구도까지 같은 그림이지만 프라도의 수태고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땅에 닿는 순간을 더 생기 있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가브리엘은 친절하고 마리아는 감동한다. 전령의 의무와 준엄함이 억제된 듯한 느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yAIbVC1sU
 

Murillo, Infant Christ and Saint John

무리요, 어린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안을 제거하고 어린양, 아기천사, 아이들, 아름다움과 희망만을 남긴, 비현실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고통만 남은 이 시대에 치유의 힘을 줄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답다.

Crespi, Pieta

크레스피 피에타. 가장 긴 시간 동안 이 그림 앞에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을 향한 마리아의 시선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모성. 지금까지 보아온 피에타는 슬픔과 체념, 구원의 감정만이 있었는데 비해, 아들의 시련에 대한 원망, 신앙보다 앞선 모성이 느껴졌다. 이보다 인간적인 종교화가 있을 수 있을까. 예술은 인간이 하는 것 아닌가.

Velazquez, Las Meninas

프라도의 대표작, 벨라스케스 시녀들. 대학생 때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선배에게 그림엽서를 선물로 받아서 이 그림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마 프라도 미술관에서 산 엽서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적당한 선물이었을 듯. 나는 이 그림의 공간적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 실제 그림의 주인공인 왕녀와 시녀들, 캔버스 바깥에 존재하며 그림 안을 쳐다보고 있을 왕과 왕비, 어두운 방에 대비되는 밝은 문밖의 공간과 앞에서 방안을 바라보는 남자의 존재. 그리고 그림 앞의 나에게 수렴되는 시선.

 
고야의 그림 앞에 섰다. 마하 연작. 사회적 비난과 관심을 받았던 작품. 낭만적 작품처럼 보이지만 마네의 올랭피아에 의한 영향인지 조롱과 비판이 가득 느껴지는 그림이다. 옷을 벗은 마하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화사한 화장과 진부한 미소를 짓는 옷을 입은 마하를 이용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Goya, El tres de mayo de 1808

1808년 5월 3일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그 작가 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 한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 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

 

도둑은 언제나 제 발이 저리지.
 
그리고 사투르노. 제우스의 부신 크로노스. 최고신에 대한 집착으로 레아 사이에서 탄생한 자식들을 모두 잡아먹고 만다. 레아의 꾀(강보에 돌을 넣어서 마치 아기인양)로 목숨을 건진 제우스에 의해 실각(살해라는 설도 있고..)을 당하기 전까지 모두 5명의 자식을 잡아먹는다. 격변과 우울의 시대 중심에 있었던 이 연약한 예술가의 눈에 비친 권력의 모습은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야만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이 그림을 여러 번 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림을 첨부하지 않았다.

 
프라도를 찾은 이유, 여행을 시작하게 해 준 그림이다. 고야의 검은 그림 중 하나인 일명 모래에 묻힌 개. 여행을 시작하기 전 끝을 알 수 없는 모래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개처럼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정신적 고갈에 빠져 있는 내가 있었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걷고 아름다운 것만 계속 보면서 치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모래에 묻힌 개가 아닌 흙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를 보았다. 꿈이 이루어지더라도 남은 삶은 강렬하며 꿈 없이 살더라도 삶은 중요하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산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야  나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을 내가 이해할 수 없듯 나의 고통도 남이 알 수 없다. 내가 나를 잘 이해해야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서경식 선생님의 말처럼 저 개는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