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영화

Blow up

야채타임스 2023. 12. 31. 01:47

- 고전 걸작이라는 불편한 수식어가 붙어있는 걸작의 이해

- 사진의 이해

 
Blow up (1965)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롤랑 바르트 / 카메라 루시다
장 모르, 존 버거 / 말하기의 다른 방법
 

 
영화의 첫 장면, 허름한 차림으로 대단한 장면을 포착한 듯한 필름이 담긴 카메라를 들고 공장(촬영을 위해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을 나서는 토마스의 표정에는 의기양양함과 함께 산업 사회의 빈민층에 대한 멸시가 서려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태워버리라고 말한다. 사진집 출간이나 화보를 위해 사진을 찍는 그에게는 모델을 제압하는 자신감과 대담함이 보였지만 그 대상에 대한 경멸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사진들이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는 생기가 없다. 나의 눈에 어떤 실재를 지닌 것처럼 보인 사진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막연한 흥미, 말하자면 세련된 흥미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롤랑바르트/카메라 루시다 중)> 롤랑 바르트의 말과 같이 패션 사진가인 토마스에게 있어 스튜티오의 모델 사진은 일종의 따분한 *스투디움 일뿐인 것이었다. *푼크툼이 부재한 사진은 여전히 지루하다.

*스투디움 : 작가의 의도를 관객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푼크툼 :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객이 자신의 경험과 사유에 의해 작품을 판단하는 것

 
토마스는 우연히 (La Tuche) 공원에서 한 연인을 목격하게 된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공원에서 그를 이끈 것은 비둘기 떼도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밭도 아닌 그저 우연에서였다. 물론 퓰리처상 수상작이나 엄청난 감동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진들이 모두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상을 찾고자 하는 집착과 우연이라는 요소는 반드시 접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자신의 폭력과 증오로 점철된 사진집의 마지막을 평화로운 공원의 풍경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공원에서 만난 여인의 사진을 현상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여인의 시선, 그리고 시선을 따라간 곳의 총을 든 사나이,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시체. 그는 편집증 환자처럼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한다. 확대 또 확대. <이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롤랑 바르트/카메라 루시다 중)> 지나치는 이에게는 평화로운 공원의 사랑스러운 연인의 평범한 사진일 뿐이지만 토마스는 이것에서 바르트가 말한 하찮은 세부를 발견한다. 그리고 흥분한다. 살인 현장을 뒤쫓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토마스가 미심적인 부분을 필름에 색연필로 표시한 다음 인화하고 그것을 다시 확대해서 인화하는 과정이었다. 컴퓨터로 해상도를 키우면 간단한 작업이겠다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서 그와 같은 방법을 거쳤다면 토마스가 사진을 확대하며 시체를 발견하는 긴박감이 제대로 표현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을 인화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의 짜릿함. 나의 전공인 컴퓨터 공학과 교수님들도 학창 시절 천공 카드에 프로그래밍을 해놓고 하루 종일 실행을 기다린 후 결과를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간단해진 지금, 내가 발 디딜 수 없었던 시대를 이런 부분에서 동경하게 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공원의 연인과 카메라 렌즈 뒤에서 그들을 바라본 토머스는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었다. 그것에 대한 증거품은 그들의 장면이 담긴 필름. 그러나 사진을 도난당한 후 마지막 한 장 남겨진 죽은 남자의 확대 사진을 본 토마스의 연인은 이렇게 말한다. '빌도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어요.' 분명히 자신이 촬영한 사진에 남겨진 시체가 그녀에게는 점묘법을 구사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장의 사진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을 말한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장 모르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떠오른 생각을 말하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한 가지 사진을 보고 모두 다른 생각을 말했다. 그들은 사진 속의 객관적 대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개성을 투영하여 서술한다. 그것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살인 사건의 목격자는 자신 한 사람, 남겨진 증거인 한 장의 사진은 자신이 확신한 진실을 스스로 부정한다. 여기에서 그가 목격한 살인 사건의 실체는 모호해진다. 살해당한 남자와 자신을 찾아온 여인의 행방을 찾던 그는 사건의 존재까지 부정당하게 된다. 사라진 시체. 사라진 증거.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진실도 말하지 못한다. (존 버거/ 말하기의 다른 방법)> 관객은 과연 사진이라는 매체가 전하는 진실을 대중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감독의 거짓에 불과한 것인지, 진실과 왜곡, 그것의 경계는 어떻게 지어져야 할 것 인지에 관해 의문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든 것이 가상일 경우 이것은 현실인가 가상인가 판단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처럼 사진은 프레임 속에서 인화지 위에 혹은 디지털 레코드에 남게 되는 찍히는 대상물 외에 많은 것을 내포한다. 사회적 이슈, 이데올로기, 혹은 대상의 이미지에 의해 사실은 왜곡되거나 축소, 심지어 무시하게 된다. 사진 속 대상물의 값어치보다 사진 밖의 요소로써 사진은 평가되는 것이다. 반면 나는 사진의 사실성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푼크툼은 나로 인해 사진에 덧붙여지지만 사진을 구성하는 재료인 대상물로써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사진 속의 대상물은 존재하지만 진실은 아니고 거짓을 말하지도 않는다.

사진 속의 시선은 공허를 향하고 있지만, 그 공허는 카메라 렌즈 뒤의 사진을 찍는 사람을 향한 시선이다. 사진을 보는 관객과 사진 속의 대상 사이에는 불가피한 단절이 있다. 시간의 공백. 그 불연속성의 충격을 사진은 전하고자 한다. 이것이 실재하는 존재와 사진에 찍힌 대상이 갖는 차이점이다.

감독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1966년의 영화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모두 단절되어 있고 그 시간의 공백은 관객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위대한 사진과 영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큰 힘을 가지게 되는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소녀에게 이방인은 어떤 이미지일까.

 
장 모르의 이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의 웃음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영원히 확인할 수 없는 그녀가 본 이방인과의 관계를 사진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기계적으로 빛을 이용하여 종이나 데이터로 기록된 것만이 사진은 아니다. 그녀가 보았던 보이지 않는 이방인의 이미지는 사진과 같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공 없이 테니스를 치던 마임 연기자들에게 공을 던져주는 토마스의 마지막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혹은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아직도 사라진 시체의 행방이 궁금하다. 토마스의 사진과 살해된 남자의 존재는 허상인 것인가. 사진은 보여주지만 언제나 침묵한다. 그래서 사진은 강력한 증거물은 될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로써 전달력이 약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매체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결여된 객관성 때문에 사진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아닌 이중적인 기록을 담는 모호성의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 학부 교양 과목이었던 '사진의 이해' 수업 제출 리포트



 


왜.. 제목이 욕망일까.. 아직도 의문이다.
내가 쓴 뻘글 중에 가장 긴 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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