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 your worst fear
Captain Marvel (2019) / Anna Boden
캡틴 마블은 기억을 잃은 채 크리족의 행성에서 살아가던 캐럴이 지구에 불시착하여 옛 기억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스토리로 남성 히어로 중심의 MCU 세계관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페미니즘 책 한 권을 읽는 듯한 묵직함을 안겨주는 첫번째 여성 히어로 주인공인 마블의 솔로 무비이다. 지금까지 여러 매체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들은 공감 능력이 강하고 감성적인 존재로 위기의 순간에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지혜와 능력, 미모를 갖춘 완벽한 인물이 되어, 제멋대로이고 통제 불능이지만 정의로운 남자 주인공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국한되어 있었다.
많은 여성들은 능력은 있지만 배려심 또한 깊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현명함을 (나는 여성에게 붙는 이 현명하다는 단어가 너무 싫다.) 갖추어야 인정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경험을 반복적으로 학습하여 자기 검열에 유능한 사람이 된다. 도입부의 캐럴 또한 누구보다 강하지만 시스템에 의해 그 능력을 통제당하고 스스로 한계를 제한해야 했다. 스스로 반복한 학습으로 인해.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이런 곳에서 쓰여야 하는 듯. 여자아이기 때문에 억압받았던 지구에서의 어린 시절이나, 파일럿이 되기 위해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과 일맥상통한다.
캐럴의 불주먹은 시각적 강렬함을 위해 사용된 특수 효과이지만 현실에서 이런 능력을 가진 여성은 자신의 능력을 과감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항상 사회에 녹아들어 버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학습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김연경 선수 같은 캐릭터를 받아들인 게 얼마나 되었나.
그러나 캐럴은 자신을 구속하는 것들을 의심하지 않고 깨트린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실행한다. 정체성을 각성하는 과정에서도 망설임이 없다. 나에게는 망설이지 않는 과감함이 영화의 포인트였다.
액션 완성도에 대한 비평이 많았지만 타노스와 대적할 히어로이니 그 능력은 행성을 터트리면서 싸우는 스케일 일건대 여기에 아이언맨이 로켓 날리는 그런 잔 기술은 없어도 별 상관없었다. 자신을 위해 웃어주지 않는 여자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자가, 스판 슈트를 입어도 섹시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강해 보이는 여자가 싫었던 사람들의 구실인 것 같았다.
엄청난 웨이트로 다져진 브리 라슨의 날액션이 정말 좋았고(이 여자 소셜 가보면 진짜 웨이트 무섭게 한다. 3대 300? ) 넘어졌던 캐럴이 웃으며 다시 일어나 불주먹을 날리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캐럴에겐 증명할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가비지의 I'm only happy when it rains 이 나올 때 실로 스무 살로 타임리프 한 듯한 감동을 느꼈다. 그걸로 이 영화의 완성도는 퍼펙트. 가장 좋았던 부분.
오바마가 퇴임 전 한 대학 강연에서 "역사는 언제나 직선은 아니지만 정의와 진보의 방향으로 흘러간다."라는 말을 했었다. 진보의 역사는 인권과 평등의 확대이고,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방향이다.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고, 여성 참정권도 얻었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었고, 2019년 낙태죄 합헌 불합치가 결정되었다. 여성을 가부장제 지탱의 자원으로 치부하지 말고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기를. 그리고, 도망가고 납치당하고 강간당하고 토막 내어져, 강가에 흩어지거나 냉장고 속에 넣어진 후 가해자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영화는 그만 만들어졌으면. 요즘은 잘 없는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