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꽤 많은 여행을 했는데 정리되어 있는 것이 없다.
지금부터 쓰는 기록들은 지금은 잘 생각도 나지 않는 사회 초년생 때의 여행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 동안 충동적으로 도망쳐 버린 시간들의 파편들이다. 여행 정보야 이미 흘러넘치고 있으니 그때의 느낌만 한 곳에 남겨 보고자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은 나를 가장 설레게 만드는 사건이다.
내 생애 첫 번째 여행은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이다. 신입사원 딱지를 떼기도 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계획해 보았다.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기에 그때의 설렘은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항공권을 어떻게 사는지도 호텔은 어떻게 예약하는지도 현지에서 어떻게 다닐지 아무것도 몰라 대형 여행사에 들어가 그냥 부다페스트를 갈 수 있는 패키지를 결제했다. 아마 글루미 선데이라는 나의 글루미 한 삶의 궤적을 지배했던 영화 때문에 돈을 벌게 되면 무조건 부다페스트로 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나는 자의적 강박에 의해 부다페스트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 나를 놓고 신입사원이 건방지게 사수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 일주일씩 휴가를 냈다는 뒷담화가 돌았다는 후문을 들으면서 아, 여유만 있었으면 입사 전에 진즉에 다녀왔지 너네는 다 갑부 자식이구나 하면서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던 기억이 있다. 후배를 깔 때는 앞에서 까기. 자신 있으면. 우리 싸부님은 다 괜찮다고 했었다고. 시간이 지나고 드는 생각은 여행을 좋아한다면 합격 후 입사 직전, 자신의 업무가 확정되기 전, 혹은 사무실에 필요가 없는 방치상태이거나 업무를 받았더라도 처리할 수 없는 무쓸모 상태일 때 잽싸게 놀다 오는 게 좋다는 것. 이 년 차만 되어도 업무에 대한 가중이 커지고 능력자라면 정말 자리를 비우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감이 만만치 않을 것이니 마음먹었을 때 바로 떠날 수 있는 인간이 되길. 그때의 시간은 한번 흘러버리면 다신 돌릴 수 없으니.
부담감에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놓고 가고 싶어 야근을 계속했었는데 과로 때문이었는지 출근 준비하다 블랙아웃이 와서 얼굴을 다쳐 흉터가 생길 정도로 무리를 한 후 여행 계획의 바이블이었던 저스트고 책 한 권만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사용했던 너덜너덜해진 각국의 가이드북은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스마트폰도 없이 지도 하나 들고 어떻게 다녔나 싶기도 하지만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어보니 인터넷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던 때에도 잘만 다녔다고 하니, 나의 여행은 기술의 경계에서 시작되었나 싶다.
항공, 숙소,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넘어가는 야간열차까지 포함된 패키지 여행 출발 전 공항에서 여행사와 미팅이 있었다. 풀 패키지여행은 함께 출발하는 동행들과 만나서 현지에서 입국 수속과 가이드를 찾는 방법들을 알려주던데 에어텔 패키지는 발권한 티켓과 여행자료, 여행물품들을 손에 한가득 쥐어주더군. 그렇게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루프트한자 항공으로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 다시 프라하행 항공으로 환승.
숙소는 프라하 Kalin ibis, 부다페스트 호텔.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 프라하 숙소에 도착했는데 프런트 직원 한 명만 남아 있는 조용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영화 속에서 이상한 기척에 어두운 복도를 헤매다 세네 번째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동양인 자매 역할을 맡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호텔이었다고!
그러나 다음날 유럽 특유의 맑고 화창한 날씨와 맛있는 커피와 조식에 그런 상상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유럽은 햇볕을 쬐러 가는 곳이다.
프라하에서 첫 번째 일정은 벨레트리즈니 팰리스. 트램을 타고 VELETRZNI 정류장에 하차하여 팰리스라길래 궁전 같은 건물을 열심히 찾으려고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 겨우 찾은 벨레트리즈니 궁전. 아마 이 앞을 몇 번은 지나갔던 듯한데 설마 농협 중앙회 지점이 있을 것 같은 저런 빌딩이 궁전일 줄이야. 실제 궁전은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자리에 빌딩을 세워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구글맵 없이 다녔던 저 때가 생각이 잘 나지는 않는데 동서남북 방향치이지만 종이 지도를 펴고 찾아다녔던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작품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동유럽의 국립 미술관인만큼 유명 작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알차게 있어 미술관 관람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요셉 보이스, 플럭서스 (Joseph Beuys)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막연히 신비주의에 사로잡여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기를 기대하는 마르셀 뒤샹은 과대평가되었다. 예술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의 예술은 <반예술>이라기보다는 <확대된 개념의 예술>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변화를 위해 선동하며 나의 창작행위는 정치적 선동과 다르지 않고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작품을 많이 보거나 공부를 해도 내가 이것에 관해 알고 있는지에 대한 막연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아마 작품의 단면에서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닌 작가를 알고 작가의 철학과 인생에서 그 의도와 예술성을 알 수 있는 것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래, 저런 고철덩어리나 의자를 널어놓은 것 앞에서 아무리 고심을 해보아야 뭔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건 단지 내 지식의 부족 탓이었으리라.
그 외에 클림트, 처녀들을 보았고, 매우 아름다웠다. 클림트, 쉴레, 피카소, 리히텐슈타인, 고흐, 세잔, 드가, 르누아르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광범위하지 않아 전체를 관람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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