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적 없이 모르는 곳을 걷기 위해 가본 적이 있는가
크리치에스, 크리키에스, Criccieth 아직도 정확한 발음은 모른다. 여행 계획 중 어쩌다 보니 웨일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저 이 작은 동네에 머물면서 만났던 친절했던 사람들과 예쁜 마을들이 마치 잠깐 꾸었던 꿈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왜 갔던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 기억나지 않는 목적으로 인해 웨일스의 시골 마을에까지 흘러들어와 미니게 어 (Min Y Gaer)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종일 비를 맞아 차가워진 몸을 녹이며 첫 번째 밤을 보냈다.
숙소를 찾다가 문득 눈에 띄는 깨끗하고 소담스러워 보이는 이곳이 궁금했고, 기차와 버스를 달려달려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숙소가 목적이었나! 그럴 리가 없잖아! 어찌 되었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챙겨주신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든든하게 먹고 사이드로 내어주신 과일과 어제 사놓은 초콜릿우유를 챙겨서 마을 투어에 나섰다.
이 동네의 약간 트레이드 마크인 것 같은 크리키에스 캐슬. 13세기에 건축된 성으로 웨일스 왕자의 고위 죄수들과 스코틀랜드 죄수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현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냥 중세 역사 덕후들 취향이다. 로빈후드에나 나올 법한 저 아무렇지 않게 서있는 멀리서 보이는 무너진 고성 하며, 웨일스의 색감, 동화 같은 마을, 회색 지붕과 파란 언덕과 흐린 바다의 조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크리키에스. 이곳은 영국사람들이 은퇴 후 노년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듯했다. 마을은 여유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긴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고 개인의 취향이 강해서 추천은 할 수 없다. 아니 지나가는 길이 아니면 안 가는 게 좋다. 나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몸과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사람을 피해서 갔던 거였고 그게 아닌 여행은 신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놀아야지.
이곳이 가장 마음에 남았던 이유가 된 티룸. 돌로 된 벽과 지붕, 굴뚝, 문 창문, 작은 화단, 잘 가꿔진 수국, 테라스의 테이블.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완벽한 건물이다. 소원이 있다면 시골 마을 어딘가에 저런 집을 지어놓고 티룸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공방을 하든, 책방이든 뭐든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것. 나는 이 사진을 정말 사랑한다. 어느 곳을 가도 이렇게 예쁜 집은 보지 못했다.
작은 시골 마을일수록 버스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건 우리와 비슷하다. 보통 정류장에 근처로 가는 노선과 시간표가 붙어있었다. 버스를 타고 포스마독에 도착. 스노도니아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산악철도로 보이는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고 아! 나 스노도니아 국립공원 가려고 했던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미궁 속이지만 내친김에 민포드까지 철로를 따라 걸어가 보기로 했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여행의 묘미는 모르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재미에 있는 것 같다. 그러려면 무조건 많이 걸어야 한다. 웨일스의 광활함이 몸에 부딪힌다. 여기가 미드얼스. 아, 사진에서도 추위가 묻어나는 것 같다. 가을 영국 여행에는 패딩이 필수라는 걸 또 배운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칼바람을 맞으며 저 늪지 같은 곳을 지나오니 마치 호비튼 같은 따스한 느낌이 절로 나는 구릉지대가 펼쳐지는데 다니다 보니 반지의 제왕이 당연하게도 떠오른다. 볼티모어에서처럼 하루 종일 동네에만 있을 수 없으니 근처에 포트메리온이 있다고 하여 접시나 싸게 사자! 싶어 여기까지 온 것인데 민포드에서 계속 걷고 있으니 아저씨들이 차를 세우더니 포트메리온 직원이라면서 태워주겠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마 망설이겠지. 제라르 드빠르디외 그 프랑스 배우를 닮은 아저씨가 내려서 차 문을 열어주는데 차 뒤에 포트메리온 마크가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늘 그렇듯 세 번째쯤 살해당하는 동양인 역할 따위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넙죽 타버렸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역시 어디서 왔나, 한국, 강남스타일? 이런 얘기를 했겠지. 포트메리온 뒷문 안에 내려주면서 너네는 우리 게스트이니 입장료도 안내도 된다며 눈물 나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 프랑스 배우 닮은 친절한 아저씨.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웨일스 구석에서 흔하게 볼 수 없었던 조그마한 동양인 여자들이 신기했겠지.
수비니어샵 외에는 시설이 낙후돼서 볼 것도 하나 없는 곳이었는데 입장료가 꽤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하나 건진 건 한 피스당 만원이 조금 안되게 주고 산 접시들. 십 년이 넘었는데 안 깨져서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영국에 깔린 게 그릇가게이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철로를 따라 걸어보겠으며 언제 웨일스 아저씨들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짧은 영어로 노닥거려 보았겠는가. 걸으면서 보았던 민포드는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여행 중 찾아오는 놀라운 경험은 줄어든다. 나이가 들면 경제력은 당연히 더 좋아지기 때문에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예약과 검색, 짧은 동선을 추구하고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돈으로 대처한다. 여행의 빈틈은 사정없이 메꿔지고 예상 밖의 순간은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불편함을 원하지 않는 동행이 있다면 그런 상황은 더욱 강화된다. 그래서 다시 혼자이거나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끊임없이 모르는 곳을 계속해서 걷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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