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퇴사여행, 서유럽

한때 유행했던 퇴사 여행

야채타임스 2024. 2. 3. 13:20

- 퇴직금으로 떠나는 신나고 착잡한 유럽 여행

 
첫 직장에서 퇴사한 지도 10년을 훨씬 넘어갔다. 직장인에게 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니다 상사에게 자신 있게 그것을 던지는 상상을 한다던가 실제 실천에 옮기는 일은 거의 낭만괴담에 가깝다. 회사가 더 이상 나에게  건질 게 없다면 내 가치가 겨우 이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미련 없이 나를 버릴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지루하고도 졸렬한 프로세스를 진행하며 퇴사직전까지 나를 탈곡하려 들 테니. 대리 1년 차쯤, 우울과 분노와 만성 피로에 절여진 썩은 육신으로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진 지경에 이르러서야 퇴사를 결정했다.
 

전날 야근은 나 혼자 했는데 나한테만 뭐라고 하고 있다.

 
어쩌면 몸은 핑계였는지 모른다. 사람이 문제였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회사 생활을 힘들게 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절대 퇴사의 이유가 아니었다. 아직도 업무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내가 능력이 없어 따라가지 못했을 뿐. 그런데 내 송별 술자리에서 그 분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신 분인데 싸부님이 왜 미안해요.ㅠㅠ
 
언제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고 적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가까운 곳에 있다. 감정 쓰레기통, 술자리 정리, 일 몰아주기 등등은 괜찮았지만, 바닥을 알 수 없는 낮은 윤리 의식과 타인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사고는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른다.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복선이 있다.

 
보통 퇴사 전엔 이놈의 팀 비리를 모두 폭로하고 나갈 테다 하고 굳은 결의를 하지만 막상 퇴사가 결정되고 인사팀과 면담을 하다 보면 그래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밉던 사람도 좀 덜 미워지고, 일단은 사람이 가벼워지기 때문인지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도 잘 정리가 안되더라고. 진짜 그랬다. 팀에 퇴사자가 연속해서 나오는데 혹시 본사가 모르는 문제 있는 거 아니죠? 란 인사 담당자의 질문에 나는 일이 힘드니깐 그런 거죠. 어쩔 수 있나요.라는 쌀로 밥 짓는 소리나 하면서 형식적인 면담 몇 번 이후, 빠르게 퇴사처리 되었다. 나도 인사 담당자도 이 면담에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고 귀찮은 일 없이 처리되기만 바랬다. 그렇게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퇴직금을 꼬깃꼬깃 움켜쥐고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퇴사 여행이라는건 부러움과 걱정을 한몸에 받게하는 단어였고 나는 욜로라는 말과 함께 광풍처럼 몰아친 퇴사 열풍 직전에 퇴사를 했던 것 같다. 여행 중 길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대부분 대리급의 여성 여행자였고 얘기를 하다보니 거의 번아웃이 와서 회사를 그만둔 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압박을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이었다. 퇴사하고 나도 유튜브나 해볼까 이런건 아니었던 듯. 나도 배가 불러서 좋은 회사 때려치고 저러고 있지란 말을 숱하게 들었는데 일단 자신의 4번, 5번 척추의 모양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말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보니 퇴사란 말도, 여행이라는 말도 모두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들로만 생각되기도 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프로 퇴사러이니 하는 말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늙꼰) 
 


 
 

 
인천발 대한항공을 타고 게트윅 공항에 도착했다. 밤 11시. 늦은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게트윅 공항 입국 수속이 매우 까다롭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입국 수속은 매우 쉽고 유쾌하게 끝이 났고, 좋은 출발이라며 기분 좋게 공항 근처 호텔로 향했다. 에어포트 힐튼은 서던 터미널에 있는데, 도착한 곳은 노던 터미널이었고 리프트를 타고 터미널은 연결하는 모노레일을 타야 이동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은 헤맨듯하다. 리프트의 층수가 헷갈렸었던 듯. 어렵게 호텔에 투숙하여, 잠깐 눈을 붙인 후, 새벽열차를 타고 런던으로, 런던에서 다시 북쪽으로 북북서 쪽으로, 웨일스를 향해서.

 
뱅거역에 도착하니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나에게는 캐리어 두 개와 두 사람 머리도 가리지 못할 삼단 우산 하나가 다였다. 뱅거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다니다 카나번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릴 예정이었는데, 구경도 하지 못하고 바로 카나번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 가득한 웨일스의 풍경이란.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말의 발상지가 카나번이라고 했다. 정복과 굴욕의 역사가 공존하는 땅이라고 한다. 관광객에게는 이러한 역사마저도 아름답다.

 
카나번에서도 빗줄기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픈한 가게조차 하나도 없어서 한참을 헤매었는데 이리저리 걷다 보니 거리가 정말 예쁘더라고. 천천히 걸으면서 어쩌면 비가 쏟아지는 그날이 웨일스에 가장 어울렸던 날씨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진회색의 고성과 형형색색의 집들이 이루는 조화. 잠시 머문 웨일스의 색감은 빌리 엘리엇을 떠올리게 했다. 모든 감각이 아직도 생각난다. 정말 이런 게 걷는 여행의 묘미.

너무 춥고 배고파서 겨우 찾아 들어갔던 카나번 성 앞의 작은 펍.

 
커피는 맛있었고, 익숙한 브릿팝이 흘러나오고, 여기가 영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던 것 같다. 아 영국은 정말 항상 여행하고 싶은 곳이다.
 
카나번에서 다시 크리키에스(Criccieth)로 이동했다. nationalexpress에서 예매한 버스로 이동했는데 승객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해서 무척 친절하고 안전하게 숙소 앞까지 무사히 배달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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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즈, 백팩, DSLR, 불안한 마음은 구겨넣고 휘청휘청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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