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IE LAURENCIN, 나의 모든 삶은 오로지 그림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Marie Laurencin 마리 로랑생 (1883~1956)

삼성역 근처에 있는 마이아트뮤지엄에서 마리 로랑생 전시를 봤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처럼 같지만 괜찮은 전시를 많이 하는 곳이고 미학적으로 예쁜 작품들이 자주 걸려 굿즈 탐색하기도 매우 좋은 미술관이다. 이 근처를 자주 다니지만 전시를 보러 내려간 건 처음, 미술관 옆 고깃집은 가봤는데;;
마이아트뮤지엄 ·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18
★★★★★ ·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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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라생은 십 년 전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개와 여인들이라는 그림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굉장히 인상 깊은 화가였다는 기억만 살짝 남긴 채 시간이 흘렀는데 길을 걷다가 마이아트뮤지엄 앞에 걸린 그림을 보고 익숙한 향기가 느껴져 찾아봤더니 오랑주리에서 본 그 화가의 전시가 맞았다. 이런 운명 같은 일이 있나. 곧 장기 출장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전시를 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냈다. 사실 그냥 일찍 끝내고 갔다. 내일 야근하면 되니깐.
오랑주리, 오르세 그리고 에펠
- Starry night 프랑스에 오면 고흐와 모네를 꼭 봐야지 생각하고는 먼저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더니 첫날부터 휴관이다. 실망하지 않고 오랑주리로 향했다. 월요일 오르세 휴관, 화요일은 오랑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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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네르 시를 먼저 알고 오랑주리에서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봤을 땐 망한 사랑에 딸려서 유명해진 예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만 보였는데 전시에서 작가의 인생을 풀어놓으니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살아남아 여성에게 집중하려고 했던 화가가 보였다.
회색과 분홍, 윤곽이 희미해진 여자들과 남자의 자리는 전혀 없는. 큐비즘이 대상을 쪼개서 다시 붙이는 쪽으로 갔다면 그녀는 흐리는 쪽으로 갔다. 본인은 큐비즘이 자기 인생의 일부를 망쳤다고 하지만 "어린 소녀들"과 같은 그림을 보면 큐비즘의 영향권 속에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큐비즘이 시작되던 자리에 그녀도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남아 있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고 같은 싸움을 했는데 목록에서는 빠진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일. 큐비즘 그룹의 유일한 여성이었다는 말만 들어도 얼마나 갑갑했을지 느껴진다. 하지만 유럽의 꼰대 아재, 거기다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리얼 천재 예술쟁이들 사이에도 버텨내고 그 이상의 진보성과 예술성을 추구했음이다!
그림이 예쁜 건 어쩔 수 없어서 굿즈 이만개 사 왔다. 나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인간,
지금부터 전시를 보자.
육식양의 탄생
Prologue: The Birth of a Carnivorous Sheep
마리 로랑생의 예술 세계는 흔히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이해되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결핍과 억압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1883년 10월 31일 파리에서 정치가 알프레드 툴레와 크레올 혈동의 가정부 멜라니 폴린 로랑생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부르주아 가족 질서 밖에서 성장했으며, 이러한 환경은 남성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위화감과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확장 시절 아버지의 권위적 태도에 반발해 양을 '육식동물'이라고 답했던 일화는, 외부의 지식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세계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그녀의 전위적인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와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여성 중심적 세계관은 이후 그녀의 예술에 중요한 심리적 기제가 되었으며, 역사 속 소외된 여왕들의 서사에 매료되어 이를 '여왕들의 음악'이라 명명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그녀의 회화에서 남성의 존재를 소거하고 여성들만이 부유하는 완벽한 신화적 공간을 축조하는 동력으로 전환된다.
1901년 세브르 국립 자기 제작소에 입학하여 습득한 경험은 그녀의 고유한 조형적 뼈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도자기 표면에 안료를 얇게 펴 바르는 기술과 섬세한 선묘, 타원형 메달리온 형식에 대한 애호는 이후 유화 작업에서도 지속되어 특유의 투명하고 우아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1903년 아카데미 윙베르에 등록하며 본격적인 유화 작업에 진입한 그녀는 브라크, 피카비아 등과 교류하며 현대 미술의 흐름을 접하는 한편, 여성 화가인 루이즈 비제 르브링의 초상화를 치열하게 모사하며 의식적으로 여성적 계보를 탐색했다.
또한 나달리 바니의 문학 살롱은 로랑생의 미학적 지향점을 결정적으로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여성 간의 내밀한 교감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남성의 개입이 배제된 독립된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체험했으며, 이는 '사포적 유토피아'라는 형태로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견고한 시각적 토대가 되었다. 초기 판화 작업에서 나타나는 여성 중심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인식이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격적인 유화 작업을 시작한 초기인 1904년부터 1907년 무렵까지 로랑생은 지독한 현실적 우울과 자기 의심의 시기를 겪으며 이를 안티-마리 로랑생' 시기라 명명했다. 이 시기에는 화사한 파스텔 톤 대신 갈색, 회색, 검은색 등 무거운 단색조 기법에 천착하며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자화상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렸다. 특히 남성 화가들의 전유물이었던 흰색 작업복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화상은 수동적인 객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창작 주체로서의 자아를 선언한 혁명적인 시각적 표출이었다. 이 고독한 침잠과 투쟁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몽마르트르 아방가르드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중심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내부적 토대가 되었다.

그날 선생님이 공부 시간에 양에 대한 숙제를 내었습니다. 마리는 9살, 어머니께서는 늘 마리에게 무관심하신 듯했지만 매력적인 모습에 말수가 적고 노래를 아주 잘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재미 삼아 딸에게 물건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잘 봐주시기도 하는 분이지만 칭찬을 해 주실 때에도 큰 소리를 내시는 것과 이마에 거칠게 입 맞추는 등 난폭함 같은 것이 있어 마리는 싫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양에 대한 숙제구나. 양 본 적 있지? 양이 어떤 동물인지 알고 있을 거야. 좋아! 그래, 양은 무엇을 먹을까?"
"풀이요."
"그렇지. 양은 초식동물이라는 거다."
아버지는 만족해하시며 가셨지만, 마리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양은 초식동물이라고 쓴다면, 그걸 안 것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셈이야. 안 돼, 양은 육식동물이라고 써야지.'
다음 날 선생님은 화가 나서 마리에게 크게 야단을 치셨고 소리를 치기까지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자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네. 어저께 아버지가 네게 양은 초식동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마리는 너무 슬퍼서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마리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찾아와 입 맞추며 위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잘 자거라, 육식하는 양 아가씨."
그건 다름 아닌 마리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고자질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조용한 미소로 마리를 바라보며, 틀림없이 마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나, 육식하는 양 아가씨네!"
그건 이 두 사람 사이의 일종의 동맹이었고, 어쩌면 '남자'라는 존재를 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마리 로랑생, 「밤의 수첩』 (1956)

본격적으로 맛을 듣기 시작한 1904년부터 1907년 무렵까지, 로랑생은 학업에서의 좌절과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자신을 두고 "슬프고 못생겼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여겼고, 철저한 자기 부정과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 그녀는 붉은색과 노란색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인해 갈색과 회색, 검정에 가까운 단색조를 사용해 거칠게 자신의 형상을 표현해 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구해 냈고, 이 시기를 '안티-마리 로랑생' 시기라고 불러냈다.
젊은 미술학도였던 마리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값비싼 캔버스 대신 하나의 나무판 양면을 사용해 냈고, 모델을 고용할 형편도 되지 않아 오로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반복해 그려냈다. 이러한 궁핍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결점이라 여겼던 부은 눈과 두꺼운 입술을 오히려 대담하게 과장해 냈고, 억압된 내면을 치열하게 직시해 냈다.

세탁선의 여인
혁신의 물결 속에서
Chapter 1. The Muse of Bateau-Lavoir: In The Waves of Innovation
마리 로랑생의 예술적 여정에서 1906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는 그녀가 몽마르트르의 아방가르드 중심지로 진입하여 현대 미술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확립한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1900년대 초반 파리 미술계는 후기 인상주의의 잔상과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가 충돌하던 격렬한 지각변동의 장이었으며, 그 중심지에는 '바토 라부아르(세탁선)'라 불리는 낡은 목조 건물이 있었다. 어머니와의 폐쇄적인 공간에 머물던 로랑생은 아카데미 동기인 조르주 브라크의 매개와 수집가 피에르 로셰의 후원을 통해 이 극도로 남성 중심적인 아틀리에 공동체에 입성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 입체주의의 탄생 과정을 목격하는 동시에,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며 '세탁선의 뮤즈'이자 독립된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 시기 로랑생은 입체주의의 기하학적 실험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해 나갔다. 남성 화가들이 대상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데 몰두할 때, 그녀는 선의 리듬감과 장식적 요소에 집중하며 입체주의를 여성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안티-큐비즘'적 태도를 견지했다. 특히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일행을 화면에 담은 집단 초상화들을 통해 그녀는 아방가르드 그룹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고히 드러냈으며, 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가 공동체 속에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와의 격정적인 연애와 이별, 그리고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내면에 깊은 상실감을 남겼고, 이러한 개인적 비극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화폭에서 강렬한 원색을 지우고 투명한 진주빛 회색과 분홍색이 주를 이루는 로랑생 특유의 색채 미학을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대에 접어들며 그녀의 예술은 더욱 성숙해져 남성이 철저히 배제된 공간에서 여성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주는 조화로운 유기적 아라베스크 선묘로 나아갔다. 미화적 자립과 경제적 성공이 정점에 달했던 1913년경, 그녀의 작품은 유럽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1914년 독일 귀족 오토 폰 바트과의 갑작스러운 결혼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과 맞물려 그녀를 예상치 못한 망명의 길로 이끌게 된다. 이처럼 세탁선에서의 시기는 로랑생에게 가장 찬란했던 예술적 황금기인 동시에, 거대한 시대적 풍랑 앞에 서기 전 마지막으로 누렸던 파리의 자유로운 공기였다.

어느 날, 로랑생은 라피트 거리에 있는 클로비 사고의 화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날 그곳에는 피카소도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바토 라부아르에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2~3일 뒤 마리가 다시 사고의 갤러리를 찾았을 때에도 피카소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피카소는 마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구와 함께 있었고, 마리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며칠 후 그 친구는 마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 마리여! 이제부터 나의 운명은 당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또 외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훗날 마리의 운명적인 연인이 될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자네 약혼자를 만났네." 파란 작업복을 입고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 피카소는 기욤의 팔을 끌어당기며 이렇게 말했다.
아폴리네르의 시 「암살당한 시인」을 보면 베냉의 새가 콜로니아망탈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제 네 부인을 보았어."
"내 부인이 누군데?"콜로니아망탈이 묻는다.
"나도 몰라. 보기는 했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젊은 여자였어. 고통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고,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여자임에 틀림없어. 그녀에게서는 월계수 잎의 그윽한 향기가 풍겨. 너는 줄넘기를 하기 위해 손으로 줄을 꼭 쥐고 있는 그 여자를 알게 될 거야.

잊혀진 여인
전쟁과 망명
Chapter 2. The Forgotten Woman : War and Exile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시작된 마리 로랑생의 망명은 개인적 선택과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교차하며 형성된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1914년, 그리는 독일 귀족 출신 화가 오토 폰 바트옌과 결혼하며 새로운 삶을 선택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국적을 상실한 채 '적국 국민'으로 전락한다. 불과 몇 주 만에 조국과 단절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스페인으로 향하며, 파리에 남겨둔 재산과 작업들 역시 모두 압류된다. 이는 예술적 기반과 삶의 터전을 동시에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망명 생활은 그녀에게 또 다른 고립을 안겨 주었다. 감시 속에서 제한된 생활을 이어가던 가운데. 남편의 방탕과 관계의 봉피는 그녀를 더욱 깊은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 로랑생은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채 오직 작업에 몰두하며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다. 파리의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그녀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으며, 특히 기용 아폴리네르와의 서신 교류는 정서적 지지이자 예술적 자극으로 작용했다.
반면, 피카소를 비롯한 기존의 예술 네트워크는 그녀를 외면했고, 이러한 단절은 결과적으로 기존 아방가르드와의 거리 두기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망명지에서 그녀의 시선은 점차 외부 현실이 아닌 내면으로 향한다. 프라도 미술관을 중심으로 경험한 스페인 회화의 절제된 색채와 정서는, 이전의 밝은 색감 대신 차분하고 가라앉은 화면으로의 변화를 이끌었다. 회색조의 화산과 감정의 절제는 이 시기 작업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후 말라가와 바르셀로나로 이어지는 이동 속에서도 고립은 지속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예술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경험한 전위적 예술 환경은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글쓰기와 회화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격자무늬는 단순한 장식 요소를 넘어, 감시와 구속, 그리고 유폐된 상태를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로 기능한다.
전쟁 말기, 아폴리네르의 죽음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상실을 안겨 주었고, 이러한 애도는 이후 작업 전반에 깊은 정서적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 국적이라는 굴레 때문에 즉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등지를 떠돌던 시키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내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의 결혼생활의 용과는 더욱 심화되었고, 로랑생은 점차 기존의 삶과 완전히 단절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1921년 이혼을 통해 모든 경제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독립을 선택하며, 비로소 파리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무지개 위의 춤
파리에서의 전성기
Chapter 3. Dance Above The Rainbow: Her Heyday in Paris
1921년, 파리로의 귀환과 함께 로랑생의 예술은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타의에 의한 망명은 스스로 선택한 고립으로 전환되고, 억눌렸던 감각은 다시 확장되기 시작한다. 전후의 파리는 전통적 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감각과 욕망이 분출되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로랑생의 변화와 맞물려 작용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성공적인 재출발을 이루었고, 더 이상 주변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법적•경제적 자립의 확립이었다.
이혼을 통해 국적을 회복하고 압류되었던 권리를 되찾은 그녀는 외부의 간섭 없이 작업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귀환 이후 로랑생의 삶과 작업은 안정과 확장을 동시에 경험한다. 화상과의 협력 관계는 지속적인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고, 이는 창작에 대한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녀의 감각은 보다 자유롭게 전개되며,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한편, 개인적 차원에서는 신체적 위기와 회복을 겪으며 삶과 존재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한다. 이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보다는 내면의 질서와 감각에 집중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1920년대 초, 로랑생은 파리의 한 공간에 정착하며 외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외부의 규범과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영역으로 기능했으며, 여기에서 그녀는 여성 간의 친밀성과 정서적 교감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을 형성해 나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로랑생은 특정한 예술 경향에 종속되기보다, 문학과 패션, 무대미술 등 다양한 영역과의 교류를 통해 감각 중심의 유연한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결과적으로 1920년대의 로랑생은 전쟁 이후의 단절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자립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해 나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외부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고 형성된 이 세계는 이후 그녀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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