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잡담

베로니카의 눈물

야채타임스 2025. 7. 27. 02:08

 
나는 회사에서 받은 책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교육 신청하면 받는 책은 보통 인문학 서적이고, 도서비 지원을 받아서 IT 서적도 살 수 있고, 한때 줄기차게 회사 도서 이벤트에 응모해서 소설책을 몇 권 받은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김미월 작가의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라는 소설집을 받았는데 며칠 후 또 다른 책 한 권이 사무실로 도착했다. 2030 트렌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목의, 전혀 관심이 없는 책이라 생각 없이 서랍에 넣어뒀다. 그런데 어느 날 담당자로부터 책이 잘못 배송됐다는 메세지가 왔다. 고이 모셔둔 책을 재포장해서 반송했더니 고맙다는 메세지와 함께 책 한 권이 도착했는데, 그 책이 바로 권지예 작가의 '베로니카의 눈물'이었다.
 
목차만 봐도 설레는 여행 소설일 것 같았다.
 
- 베로니카의 눈물
-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서나
-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  플로리다 프로젝트
-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  내가 누구인지 묻지마
 
쿠바, 파리, 플로리다, 발칸.. 말만 들어도 낭만이 흐르는 여행지가 배경이 되고, 첫장을 넘기고 내가 감정이입하기 좋은 30,40대 여자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쿠바행 비행기표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순식간에 장소에 대한 환상을 박살 내면서 유전자에 새겨져 내려오는 것 같은 한국 여성의 삶을 낯선 곳에서 구성한다. 빈곤과 폭력과 배신 속에서도 일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를 살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소영현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권지예의 소설에서 여행이 만들어내는 거리화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나 다시 일상을 영위하게 할 회복의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찰에 이르는 귀환의 감각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권지예의 여행 소설은 일상을 되살게 할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회피했던 삶의 진실에 직면하는 시간에 더 가깝다. 일상의 윤곽은 일상을 벗어나면서 좀 더 뚜렷해진다. 여행을 통해 오히려 일상의 숨겨진 이면을 좀 더 날카롭게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
소설에서 여행은 여성으로서의 그녀들의 삶이 해체되고 재조직되는 시간, 즉 부재의 시간과의 조우이다.

 
그런데 이런 여성주의적 소설에 내 기준으로는 한국 영화판에서 가장 현학적이라고 생각되는 남자배우의 추천사가 담겨야 한다니. "갑자기 비행기표를 끊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식의 글 나부랭이가 말이다. 작가 하정우란다. 출판사 홍보용이었겠지만 너무나 한국적이라서 빡침.
 
아래부터 스포일러 있음.
정말 단순한 표면적인 예만 들어도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해변의 낙조를 보면서 생에서 만나는 이런 천국처럼 빛나는 순간을 파라다이스 빔이라고 주인공에게 말해주는데, 이 남편이 남긴 유품 중에는 예전 아바나에서 만났던 성매매 여성에게 줄 선물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아내와 함께 갈 여행에서 다시 만나 줄 계획이었던 선물말이다.
엄마와 딸이 함께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엄마와 딸이 똑같이 겪는 직장 내 성폭력 이야기이다. 이 책이야 말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가 겪게 되는 현실같다. 예쁜 그림책을 폈는데 내용은 잔혹동화인 그런 책인 것이다.
 
 
 
 
 


 
 
 
내가 산 책이 아니라서 미뤄만 두고 있다가 (직접 산 책도 잘 안 읽는데 공짜로 얻은 책이 잘 읽어지겠느냐면서.. ) 요즘 책도 너무 읽히지 않고 보고서 문장도 잘 만들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에 장르 소설이나 평소 쉽게 읽었던 종류의 책을 찾아서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이 책이 적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브릿G에서 연재 중인 소설을 읽고 있어 단편집과 장편, 그리고 SF, 판타지, 일반 소설로 조합해서 레베카의 눈물과 함께 배명훈 작가의 기병과 마법사, 그리고 브릿G 연재 소설인 청록의 시간, 그리고 테드 창의 숨을 같이 읽었는데 숨이 제일 안 읽혀서 아직 다 못 읽었다. 아니, 거의 못 읽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진짜 숨도 못 쉬고 읽었는데.. 독서력도 집중력도 나이가 들면 퇴행하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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