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영화

베스트 오퍼

야채타임스 2025. 5. 6. 01:35

-  모든 위작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

 
The Best Offer(2014) / Giuseppe Tornatore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연출하고, 엔리오 모리코네가 영화 음악을 맡아 화재가 되었던 베스트 오퍼. 버질 올드만은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 까다롭고 외로운 미술품 감정가이자 경매상이다. 그리고 광장공포증을 가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인 클레어에게 그녀가 상속받은 고저택의 가구와 예술품 평가를 의뢰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스터리, 로맨스가 혼재된 서사로 긴장감이 가득한 독특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을 원 없이 볼 수 있어 제프리 러시의 필모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 최근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올드먼의 비밀방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 몇 가지를 보자. 1930년대 러시아 작가 얀스키의 '갈증'이라는 그림은 검색을 하면 영화를 보고 이 그림을 찾는 사람들의 글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영화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그림인 것 같다. 하지만 화가를 바라보는 단발머리 소녀의 매력적인 눈빛과 테이블보와 파란 치마의 대비가 주는 밝은 느낌은 비밀방의 어느 명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어린 소녀의 초상'은 올드먼이 골동품 감정 중 발견한 먼지 쌓인 목판을 복원한 진품이지만 주인에게는 크리스투스의 모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경매에 올려 본인이 낙찰받으려고 시도한 그림이다. 크리스투스는 얀 반 에이크의 제자로 추정되는 화가로 어린 소녀의 초상 또한 에이크의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어두운 배경과 빛에 의해 드러나는 얼굴 윤곽의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비밀의 방에는 르누아르, 벨라스케스, 뒤러 등 수많은 명작이 전시되어 있지만 이 그림에 유난히 집착하는 올드먼이 조금은 이해되는 작품.. 그래도 노욕이다 노욕.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는 올드먼의 방 전체가 잡힐 때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그림이다. 초상화에 담긴 유명한 이야기는 모두가 알 것이고 나에게는 이 그림을 좋아하게 된 또다른 계기가 있다. 부잣집에서 일하던 어린 여자가 그 집의 아들에게 이용당한 후 처절하게 복수하는 내용의 단막극을 오래전에 봤었는데 그 집에 걸려있던 그림이 바로 베이트리체 첸지였다. 그 여자가 시골에서 먹던 곤드레밥이 너무 지겨웠다는 말과 이 그림이 너무 대비되면서도 어울려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는데 그래서 곤드레밥을 먹을 때마다 난 베이트리체 첸지를 생각한다.ㅍ_ㅍ 그림 자체가 정말 아름답고 모나리자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함께  3대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 아래 너무너무 스포일링 -

 
개봉한지 십 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본 계기는 최근 지브리 스타일 AI 생성물에 대한 비판글을 읽은 후 가장 먼저 베스트 오퍼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본 후 이제는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 작품의 진품성(authenticity)의 관점에서 보면 위작은 진품을 모방한 가짜이고, AI 작품은 생성물임을 먼저 밝힌 창작물일 수 있겠으나 둘 다 오리지널리티와 작가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위작과는 다르게 AI 생성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스케일을 넘어서는 수준이겠지만.. 사회 문화의 방향을 바꿔버린다거나 직업군에 변화를 줄 수도 있겠지.

위작에도 항상 진품의 면모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 위작이더라도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붓터치 같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말거든. 본래 의도와 다르게 말이야. 자기표현의 정신. 그게 진품의 감성이야.


그러나 나는 이 대사를 통해 예술이란 인간(의도)의 영역으로 위작과 모작에도 작가의 흔적이 남겨지고 진품의 가치가 담기는 건데 AI 그림은 그게 없다는 부분에서 불쾌함과 공허함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품에도 혹은 거짓(사기)에도 일말의 진심이 부여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무엇인가. 클레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아줘요." 라고 했단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조차 할 수 없는 것이 AI가 생산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혹은 의도 자체가 없이 무한한 데이터를 모호한 지시로 나열한 ”무엇“이 아닐까.

그래서 클로드에게 물어보았다.
Q. 영화 베스트 오퍼에서 위작과 모작에도 작가의 흔적이 남겨지고 진품의 가치가 담기는 거라고 하는데 AI에게도 의도가 있어?

A. "베스트 오퍼"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위작이나 모작에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흔적과 영혼이 담기는 것은 이런 인간적 의도와 선택의 과정 때문이겠죠. AI는 아무리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도, 그 안에 자아나 의도, 감정적 투영이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 AI는 학습된 데이터를 반영할 뿐 자신만의 예술적 의지를 담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물론 이는 현재 AI 기술 수준에서의 이야기이고, 미래에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요.

 
또 다른 논의란 어떤 걸까.
스카이넷은 오고야 마는 것인가.
 




여담으로 내가 오랜 시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게 타고난 재능이나 다년간의 수련으로 길러진 스킬을 흉내내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그림에 내 아이덴티티를 남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리고 싶다는 것 외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는 프로의 영역이었던 것.



'노트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능한 사랑  (0) 2026.09.24
인터스텔라, 가르강튀아  (0) 2026.05.07
Bad Boys2  (3) 2024.11.27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1) 2024.11.21
천년을 흐르는 사랑  (1) 202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