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야채타임스 2024. 10. 20. 09:33

-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지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2013) / Ben Stiller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단편소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영화화한 작품. 각본은 다른 사람인 듯.


-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그냥 스포일링 밖에 없음 -
 
월터는 16년 동안 같은 회사를 다니며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과를 처리하는 그러나 틈만 나면 존아웃 상태에 빠져 일상에서의 탈출, 아니 회피를 시도하는 그런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은퇴를 하면서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준 피아노를 처분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월터의 가계부에는 대부분 엄마의 은퇴 후 생활 혹은 피아노 관련 자금, 그리고 여동생 오데사의 벌금이고 본인을 위한 것을 e하모니 가입비 정도가 되겠다.

 

이런 그에게 직장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월터는 현재 폐간된 시사월간지인 라이프의 네거티브 에셋 매니저를 맡고 있고 라이프는 온라인으로의 전환을 위해 구조 조정 및 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있는 중이다. 라이프지의 대표 포토그래퍼인 션 오코넬은 그동안 많은 작업을 해온 월터에게 필름롤과 라이프지의 모토가 새겨진 지갑을 월터에게 선물하면서 25번째 네거티브인 ‘Quintessence of life’를 마지막 호의 표지로 넣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25번째 필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총무팀의 쉐릴 멜, 호프에게 션의 위치를 찾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면서 월터의 여행이 시작된다.
 
쉐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월터가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회사 동료로, e하모니라는 데이팅 어플에서 월터가 눈팅하고 있는 상대이다. 월터가 쉐릴의 프로필에 윙크를 누르려고 하지만 월터의 계정이 텅텅 비어 있어 윙크를 누를 수 없었고 이때 연락하게 된 e하모니의 상담사인 토드와의 인연도 시작된다. 토드는 월터의 텅 빈 프로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션 오코넬이 월터에게 선물로 주는 지갑에 새겨진 라이프지의 모토. 이 지갑 갖고 싶어.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월터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에서 나의 삶과 인생을 투영하기에 가장 좋은 캐릭터이다. 적당한 직장에서 적당한 셀러리를 받으며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회사의 측면에서 보면 사소한 부속품에 불과하지 않기에 개인의 사정, 혹의 회사의 사정에 의해 일터를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나는 나를 그대로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 때문에 이 영화를 인생 영화 중 첫 번째로 꼽을 수도 있다. 어딘가 있지만 존재감은 없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서 데이 드림에 빠지는 걸 좋아하고, 어린 시절 포기해야 했던 무언가도 있었고. 어떻게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통의 경험일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태산과도 같은 상실일 수 있는 것들..

 

저러는데 안 갈 수 있음?
아니, 안 가고 배김?
 

월터는 션이 있는 곳을 추적하기 위해 나머지 필름들을 현상해서 그린란드에 있는 선박 이름을 찾아내고 드디어 그린란드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이때 라이프지의 모토가 월터가 공항으로 내딛는 길 위에 새겨지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벅차게 한다그리고 월터가 벅찬 가슴을 안고 내린 그린란드는..

 

쉽게만 풀리면 인생이 아니지. 그것도 무려 ‘Quintessence of life’를 찾는 여정인데. 레오가 빨간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 고민했던 순간처럼 월터는 고민없이 진짜 세상을 알게 해주는 빨간색 마티즈를 선택한다! I think the red one. 정말 좋아하는 장면. 그러나 빨간색 마티즈를 타고 누크의 펍으로 가보니 션은 이미 떠났다는 소식을 바텐더에게 전해 듣고 그를 좇기 위해선 선박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헬리콥터를 타야 하지만 이미 만취상태인 조종사를 따라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순간, 월터에게 쉐릴이 나타난다.
 
https://youtu.be/HEwtPwkeXjw?si=jEF0U8j33KQd3wth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 난 원곡보다 쉐릴이 불러주는 버전을 더 좋아하는데 라이프지의 온라인 전환 책임자인 핸드릭스가 월터를 조롱하기 위해 Major Tom이라고 부를 때 쉐릴이 그 노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월터의 상상에 쉐릴이 나타난 것 같다. 아 또 눈물..
 
그렇게 월터는 쉐릴의(?) 응원으로 헬리콥터에 오르지만 여차저차해서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그린란드 선박의 선원이 준 클레멘타인 케이크 포장지의 메모를 보고 션이 아이야팔라요쿨 화산을 촬영하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향한 것을 알게 된다. 아이슬란드 어느 항구에 월터를 내려준 선장과 선원은 빨리 가서 자전거를 잡으라고 말하며 “Stay gold, Ponyboy!”라고 소리친다. 정말 시적이다.

 

월터는 자전거를 타고 아이야팔라요쿨을 향해 달려가며 쉐릴을 상상하다 그만 논두렁에 빠져 자전거를 망가뜨리고 이때 길에서 아이들을 만나 출근길에 오데사가 어머니의 클레멘타인 케이크와 함께 생일 선물로 준 스트레치 암 스트롱을 롱보드와 교환한다. 그리고 시대의 명장면인 아이슬란드 롱보드 씬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꿈과 그걸 포기해야만 했던 현실과 버티기 막막한 현재의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주는 장면.

 
그러나 월터는 이미 화산 폭발 촬영을 위해 경비행기에 몸을 묶고 하늘로 날아오른 션의 뒷모습만 확인한 채 아이슬란드 현지인의 도움으로 화산폭발 현장에서 겨우 빠져나와 재투성이가 된 채 파파존스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깎아준 모히칸 머리를 스스로 정리하고 파파존스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던 월터에게 롱보드와 파파존스는 어린 시절의 상실을 의미한다.
 
월터에게 모히칸 머리와 스케이트보드가 축제 같았던 어린 시절을 상징한다면 나의 그 시절은 그림과 피아노가 될 것 같다. 나도 미술학원은 오래 다니지 못했고 피아노도 팔아야 했다. 유일하게 나만 다룰 수 있었던 거대한 소유물이 예고도 없이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보던 그 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상실이란 그런 것 같다. 순식간에 모든 것에 무뎌지고 체념하게 되는.

 

집으로 돌아온 월터는 쉐릴의 아들에게 롱보드를 주기 위해 쉐릴을 찾아가지만 그곳에 머물고 있는 전 남편과 마주치게 된다. 필름을 찾는 것도 실패하고 쉐릴과의 관계도 망쳐버린 자신에게 실망하며 결국 션이 선물로 준 지갑을 버리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월터. 오랜 세월 포기와 체념에 길들여져 버린 그가 한 번에 다른 사람이 되긴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또 여차저차하다 어머니가 이미 션과 만나서 월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히말라야로 향한다는 말에 클레멘타인 케이크까지 바리바리 챙겨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린란드 선박에서 먹은 클레멘타인 케이크는 바로 월터의 어머니가 션에게 챙겨준 것이었던!! 오마이갓! 등잔 밑이 블랙홀이었다니. 월터는 다시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아버지가 사주셨던 트레블 노트과 Jansport 백팩을 꺼내서 션을 찾아 히말라야로 향하는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엄마가 또 바리바리 챙겨준 클레멘타인 케이크를 워로드가 총검으로 찍먹하고 있다.

 

히말라야로 향하기 위해 워로드에게 뇌물로 준 어머니의 클레멘타인 케이크. 워로드들은 마법과도 같은 엄마의 케이크를 맛보고 단번에 길을 내어 준다. 어머니는 이 케이크를 통해 월터를 지지하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터와 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영화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음식 이야기가 정말 좋다. 레시피를 찾아보니 오렌지를 올리는 케이크였는데 왜 클레멘타인 케이크라고 할까 궁금해하다 출장지의 마트에서 크고 껍질이 단단한 귤 이름을 클레멘타인이라고 붙여놔서 이해했다. 
 
클레멘타인은 버드나무 잎 만다린 오렌지와 달콤한 오렌지 사이의 감귤류 과일 잡종인 탱고르로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이 품종을 처음 발견하고 전파한 프랑스 선교사 클레망 로디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외관은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외관을 가진 짙은 오렌지색이다. -위키백과
이건 잡설인데 씨가 크고 많지만 매우 달고 향이 강해서 맛있다.

 

월터는 두 명의 스트롱 리틀맨과 히말라야를 등반하다 중간 지점쯤에서 이 세파들과도 헤어지고 토럴리 얼론이 된다. 월터의 표정이, 아니 사람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월터는 더 이상 데이드림, 존아웃에 빠지지 않는다. 히말라야 어딘가에서 걸려오는 e할모니 토드의 전화. 와 전화가 터진다. 월터는 지금 히말라야라서 전화받기가 힘들다고 말하자 토드는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에 이어 이제는 히말라야에 있냐고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채운 월터의 프로필에 윙크가 300개가 넘게 찍혔다고 축하한다고 하지만 월터는 사용료가 부담스러우니 프로필을 지워달라는 요청을 하고 토드는 아쉬워한다. 쉐릴이 없는 e하모니는 월터에게 의미가 없는 거니까..

 
그렇게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는데 저기 앞에서 갑자기 스노우 레오파드를 촬영하기 위해 숨어있는 션 오코넬이 나타난다. 나는 이래서 영화가 너무 좋다. 히말라야에서 전화가 터지고 산을 오르다 보니 찾고 있는 사람이 만나지는게 정말 좋다. 월터가 25번째 필름이 없어서 당신을 찾아왔다고 하니 션은 같이 동봉한 지갑에 넣어놨다고 하네? 서프라이즈? 오 마이갓 쒯. 솔직히 나라면 장난하냐고 멱살잡이를 하..진 못하겠지..
 
암튼 지갑을 버렸다는 월터의 말에 션은 섭섭한 마음은 접어두고 뷰파인더를 통해 스노우 레오파트(고스트캣)를 보여준다. 사진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에 가끔은 그냥 이 순간에 머무른다고 하며 Stay in it. Like there. Like here.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라는 월터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한다. 이미 월터에게는 필요 없어진 조언이지만.. 션은 고스트캣을 한참 바라보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Beautiful things don't ask for attention. 내가 만난 정말 아름다운 것들도 관심을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아름다운 삶의 언어만 남긴 채 션은 25번째 필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말해주지 않고 산아래 사람들과 축구를 하기 위해 내려간다. 월터도 처음으로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션과 함께 자유를 느낀다.

 
이상한 경로로 입국을 시도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예맨을 통해서 85불짜리 비행기를 타고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공항에서 붙잡힌 월터. 외적으로도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월터 미티라는 걸 보증해 줄 사람이 필요해 토드에게 연락해서 입국에 성공하고 토드는 그를 빅허그로 격하게 반겨준다. 상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라고.. 월터는 당신과 처음 대화를 했을 때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그 둘은 만나게 된다. 

 

인터넷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아마 토드가 월터를 만났을 때와 같은 감정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생각대로 만들어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그 과정. 월터는 또 이렇게 세계를 넓혀간다. 처음부터 생각해 보면 월터의 여행은 많은 타인의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쉐릴, 그린란드의 선장과 선원,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현장에서 구해준 현지인, 그리고 토드. 나의 여행도 타인의 선의에 의지했던 경험이 많고 지금 출장에도 많은 타인의 도움이 녹아있다. 내가 누군가의 타인이 되었을 경우 선뜻 선의를 내어줄 수 있는 인간이길 희망한다. 

죄책감 없는 즐거움의 시나본. 클래식롤 하나에 칼로리가 880이라고 한다.

 

토드가 입국심사를 무사히 끝낸 월터에게 사주는 시나몬롤. 꼭 토드의 발음을 들어보면 좋겠다. 스타필드에서 딱 두 번 먹어보고 없어져서 정말 아쉬워했던 시나본이란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도 홀라파가 안사에게 시나몬롤을 사주는데 나는 시나몬롤을 사주는 사람은 무조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냥 좋다. 토드짱!

 

그러나 추억은 현실을 이길 수 없는 법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월터는 결국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피아노를 팔게 된다. 필름을 찾지도 못했으니 해고 통보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싶지만 월터에게는 슈퍼 파워를 지닌 절대적 아군, 엄마가 있지 않은가. 피아노 가게에서 엄마는 정말 쿨하게 션이 선물한 지갑을 월터에게 돌려준다. 엄마가 쓰레기통에서 지갑을 다시 주워놓은 것! 역시 내가 뭘 버리면 다시 주워다 놓는 건 전 세계 엄마들의 공통분모인가. 그걸 가지고 이런 식스 센스급의 반전을 만들어 내다니.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월터가 엄마 집에서 지갑을 버린 순간 의심했어야지. 엄마가 주워놓겠네.

 
월터는 한참 회의 중인 뾰족 수염 핸드릭스에게 재수 없게 굴지 말라는 촌철살인을 날리며 ‘Quintessence of life’를 던지고 회사를 나선다. 월터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전설적인 포토그래퍼인 션을 직접 만났고 필름도 찾았지만 정작 그의 현실은 동전 뒤집듯 변화하지 않았다. 엄마의 피아노는 처분해야 했고 정리 해고도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행은 월터가 처한 현실이 아닌 월터라는 사람 자체를 바꿔버렸다. 월터에게는 네거티브 에셋 매니저 외에 많은 경험이 생겼고 쉐릴의 아들은 그가 선물한 롱보드를 타며 고맙다는 영상을 보내왔다. 산다는 건 그런 것인 것 같다.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겪지만 단지 과정이었을 뿐일 때도 있고 큰 성취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어떤 것도 좋아지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  
 
월터는 퇴직금 정산을 위해 회사에 방문해서 쉐릴을 만나고 그들은 다시 함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프지 마지막호의 Quintessence of life, 삶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관심을 바라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
그대로 있는 월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

 
To the dedicated people who made up.
모든 직장인들을 위하여.
 
 
 
 
 
 


 
 
 
 
지난번에 출장 때도 월터만 돌려봐서 이번에도 보려고 했더니 디즈니가 스트리밍이 안되네??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 그냥 수다가 떨고 싶어서 그냥 영화 줄거리를 써버렸기 때문에 솔직히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항상 쓰고 싶었던 월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영화를 본 거 같은 기분도 들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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